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제3차: [[스웨덴]] 전쟁 ([[1630년]] ~ [[1635년]]) == 덴마크의 침공을 물리친 페르디난트 2세는 이때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황제는 그 기회를 다시 발로 차버리고 만다. 이 시기에 페르디난트 2세가 왜 독선적인 움직임을 보였는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될 수 있는데, 1차적으로는 그의 독실한 종교관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특히 페르디난트 2세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전쟁을 등에 업고 절대 권력을 행사한 쪽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이 시점에서 제국 내에서 페르디난트 2세에 반항할 수 있는 군주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나온 것이 '''<복권 칙령>'''(Restitutionsedikt), 한 마디로 요약하면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진행된 모든 변동된 교회 재산을 1555년 이전으로 되돌리라는 것이었다. 개신교 정권이 들어선 곳에서 야금야금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잠식한 것들이 적지 않아서 이게 법적으로는 옳은 조치이기는 한데, 문제는 이 상황이 무려 70년에 걸쳐서 진행된 것이라 이제 와서 황제의 말 한마디에 정리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린 것. 구체적으로는 개신교도 주교 영주에 의해 통치되는 영지와 개신교도 영주에 의해 강탈당한 영지를 가톨릭 지역으로 되돌리는 것인데,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브레멘]]과 남독일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복권 칙령>의 대상인 개신교도 제후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황제 편을 들던 가톨릭 제후들 역시 자기들도 빼먹은 게 많았기 때문에 반발했다. 심지어 황제의 최대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마저도 <복권 칙령>에 반대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제국의회의 의결없이 황제의 칙령으로 밀어 붙였고, 발렌슈타인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강제로 집행했다. 이는 프랑스가 보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북독일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 페르디난트 2세는 발트해로 진출한 발렌슈타인을 통제하지 못했다. 특히 황제는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황제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이를 방관했다.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과 보호 조약을 체결한 항구도시 [[슈트랄준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슈트랄준트는 발렌슈타인이 오기 사흘 전에 스웨덴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스웨덴군의 상륙을 허용하는 조약을 맺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그가 정복한 메클렌부르크 공국의 공작위를 수여했는데, 이는 소지주 출신이 오랫동안 메클렌부르크를 통치한 니클로트 가문을 내쫓고 황제의 말 한마디로 독립 군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마침 페르디난트 2세는 아들인 [[페르디난트 3세]]를 제위 승계 예정자인 '''[[로마왕]]'''으로 만들어야 했으며, 에스파냐는 황제가 제국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네덜란드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막시밀리안 1세의 주도로 소집된 가톨릭 동맹은 회의를 통해 페르디난트 3세의 승계를 원한다면 발렌슈타인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서임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1630년에 [[레겐스부르크]]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제후들은 발렌슈타인의 해임, <토지반환령> 철회 등을 요구했으며,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의 해임에는 동의하여 일단 가톨릭 선제후들을 진정시키고 바이에른과 밀약을 맺으려고 했던 프랑스를 잠시 몰아냈다.[* 이 무렵 이탈리아의 만토바에서 공작이 죽으면서 프랑스계였던 곤차가느베르의 샤를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와 만토바에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황제는 요충지인 카살레몬페라토와 [[피네롤로]]를 에스파냐에게 넘기면 샤를의 공작위를 허가한다는 제안을 했고, 발렌슈타인을 해임함으로써 막시밀리안 1세의 동의를 얻어냈다.] 하지만 황제는 종교적 열정 때문에 끝내 <토지반환령>의 철회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황제파의 주도권은 다시 가톨릭 동맹이 장악하게 되었고, 개신교 선제후였던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안 그래도 발렌슈타인에 시달렸는데 <토지반환령>까지 강행되니 결국 황제와 적대하고 스웨덴에 붙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스웨덴이 침공함으로써 제국은 전보다 더 확실히 둘로 쪼개지게 되었고, 전쟁은 본격적으로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스웨덴의 '''사자왕'''이며 유능한 지휘관이자 스웨덴을 열강의 지위에 올려놓은 왕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발트해 지역을 보다 더 확실하게 장악하고 싶어했다. 독실한 루터파이기도 했던 그는 핍박받는 제국의 개신교도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포메른]]에 상륙하였다. 이때 프랑스가 합스부르크가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스웨덴을 지원했고[* 프랑스가 스웨덴에게 전쟁 자금을 주는 대가로 스웨덴은 독일에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프랑스의 잠재적 우군이었던 바이에른을 침공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조약 직후 조약 내용을 대대로 광고해서 추기경이 개신교와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퍼트려 리슐리외에게 굴욕을 안겼다. 이는 프랑스와 스웨덴이 대등한 파트너이지, 스웨덴이 프랑스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제국 내부에서도 개신교파 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에서 황제군 용병들의 대학살극[* 마그데부르크 시민 20,000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도시에 남아있던 시민들은 겨우 4,000여명 뿐이었다. 참고로 이 짓거리를 벌인 이유는 군량 부족 때문이었다. 제대로 보급을 받질 못해 군대가 굶어 죽어가는데 페르디난트 2세와 발렌슈타인은 내 코가 석 자라며(둘 다 진짜로 돈이 없었다.) 보급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참다못한 용병들은 보급품을 노리고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한 것이었다.]이 벌어지면서 같은 루터파였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를 위시한 많은 개신교도 제후들이 분노하며 스웨덴군에 가세했다. 든든한 지원군들을 얻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군을 일방적으로 박살냈다. 황제군 사령관 틸리 백작과 파펜하임은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의 혁신적인 군제 개혁이 이루어 낸 성과에 고무되었고, 이후 전쟁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붙였다. 또 이 전투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우선 스웨덴이 생각보다 잘 싸워준다고 판단한 프랑스가 지원 규모를 크게 늘렸다. 또한 브란덴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 헤센카셀 등의 제후들은 개신교도였음에도 1, 2차 전쟁에서 황제군에게 호되게 당했던 탓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마저 스웨덴을 믿고 다시 황제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호재가 겹치면서 더욱 막강해진 스웨덴군은 레흐 강 전투에서 황제측 총사령관 틸리까지 전사시키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페르디난트 2세는 내쫓았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호출했는데,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에게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시간을 끌기로 결정했다. 독일 전역을 헤집고 다니는 스웨덴군은 [[뤼첸 전투]]에서도 황제군을 격파하는 등 연전연승했으나, 이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했다. 그의 전사 이후에도 스웨덴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계속하였고 1634년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과의 화평을 준비하나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암살당해[* 반대파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한 것은 분명하나 주체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발렌슈타인 항목에는 발렌슈타인이 배반을 시도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당대의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 배신 여부는 불분명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다.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은 개신교 동맹군의 결집력을 약화시켰다.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브란덴부르크는 스웨덴이 승승장구할수록 브란덴부르크의 상속이 확정적이나 다름없었던 [[포메른]]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인지해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작센은 근본적으로 제국 내부의 사정에 외국인이 개입한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개신교 측의 주요 세력이었던 스웨덴군의 구스타브 호른과 작센-바이마르 공작인 베른하르트는 서로 반목했다. 반면 황제군 입장에서 양날의 검 같았던 발렌슈타인의 죽음은 이 무렵 본격적으로 유럽 무대에 데뷔한 페르디난트 3세가 군 통수권을 확고히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이후 전투를 계속한 끝에 페르디난트 3세와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의 형제. 당시 막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 상태였다.]가 이끄는 황제군은 개신교군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압하고, 1635년 '''프라하 조약'''을 통해 전쟁을 일단 종결시켰다. 이제 북독일에 잔존한 소규모 스웨덴군만 몰아내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